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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직업 이야기

기독교에서의 정의

 

퍼온 글] 

 

기독교가 생각하는 정의는 어떤 개념인가? 성서는 정의를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그 정의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때아니게 한국에는 요즈음 ‘정의’공부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요즈음은 마이클 샌델의 책이 날개 돋힌듯이 팔리고 여기저기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이 ‘정의열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분석이 있는 것 같다. 결국 한국사회는 지금 ‘정의’에 목마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정의에 대한 막연한 개념이 느낌이 아니라 정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리라.

 

정의에 대한 아주 쉬운 보편적 해답은 상생

< 더불어 함께 사는것 >나 우리끼리 등등 편이 없는 함께

영적이나 물질적 까지도 과욕 과잉 독점 치우침없이

 

WCC가 암스텔담에서 창립될 당시 1948년은 냉전체제로 세계가 심각하게 대립할 때였다. 이 이념의 갈등은 암스텔담 WCC 창립총회에서도 나타났다.

사회주의가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체제인지, 자본주의가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체제인지 체코 신학자 호마드카와 미국 교회 대표 둘레스 간에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WCC 총회는 격렬한 토론 끝에 하나님은 어떤 인간의 이념도 능가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고백하고 신앙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표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기로 한 것이다.

 

 

2010년 11월 아시아교회대표와 신학자들이 모여 아시아적 관점에서 WCC 총회 주제에 대해 논의했을 때 아시아교회대표들은 생명도 중요하고 평화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정의가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였다.

정의 없는 생명도 진정한 생명이 아니고 정의 없는 평화도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생명과 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산총회 주제에 함유된 개념은 생명, 정의, 평화이지만 그 중심 개념은 정의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정의는 항상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물론 속죄, 구원, 성결, 성화 등 종교적 개념이외에 사랑, 자비, 평화, 생명 등이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지만 정의는 항상 기독교 가치의 중심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면 기독교가 생각하는 정의는 어떤 개념인가? 성서는 정의를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그 정의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광범위한 주제여서 전체를 다 다룰 수 없지만 핵심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경전인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의 개념을 살펴본 후 이의 신학적 의미를 성찰하는 방법으로 좁혀서 집중하려 한다.

 

성경적 ‘정의’ 언어

성경에서 정의를 가리키는 말에는 구약에는 공의 즉 양심적 정의 ‘쩨데크’와 법률적정의 ‘미슈파트’란 히브리어가 있고 신약에는 ‘디카이오수네’란 희랍어가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쩨데크가 동사원형으로는 41회 사용되었고 그 의미는 ‘의롭다. 옳다. 정직하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말속에는 원래 ‘똑 바르다.’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에는 자(尺), 저울을 가리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 정의를 가리키는 상징에 저울이 쓰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인지 모른다. 이 쩨대크란 말에는 결국 윤리적, 도덕적 개념으로 표준 혹은 기준에 일치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표준, 혹은 기준은 하나님의 표준, 혹은 기준을 말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고 정당한 것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후에 기술하겠으나 쩨데크에는 바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되는데 이것은 수동적 의지가 아닌 능동적 의지이다. 따라서 하나님에세는 ‘반드시 바르게 하는’ 정의의 의지가 숨어 있다.

성경에는 짜다크 동사의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로 남성형 쩨데크와 여성형 쯔다카가 각각 119회, 157회 나오는데 이 둘의 뜻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쩨데크는 주로 재판과 관련하여 쓰이며(시 48:11, 전 5:8, 습 2:3, 신 16:20, 잠 2:9) 이 때 재판관은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즉 빼앗긴 사람, 곤핍한 사람의 편에서 판결하는 재판의 행위와 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때 재판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한다. 여성명사인 쯔다카는 주로 ‘자비’와 상호 관련되어 쓰인다.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을 보살피며 나그네와 손님을 잘 보살핀 것을 의미하는데 쓰인다.(욥 31:21-32).

구약에서 또 하나 쓰이는 정의란 단어는 ‘미슈파트’이다. 구약성경에서 422회 정도 나타난다. 미슈파트는 통치의 모든 기능을 지칭하는 사역동사인 쉬파트(Shaphat)에서 파생했는데 이 쉬파트 동사는 구약에서 202회 쓰였고 한글로는 ‘판단하다. 재판하다. 판결하다. 다스리다.’등으로 번역되었다. 명사 미슈파트는 율례, 규례, 법도, 제도 등으로 주로 쓰였고 공의, 재판, 판단, 판결, 의 등의 단어로 등장한다. 정해진 원칙이나 규칙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법률개념으로 말하면 민사행정상의 정의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입법, 사법, 행정상의 기능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치자의 바른 심판의 종합적 기능을 대표하는 말이다. 해리스(R. L. Harris)는 이 ‘정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되, 하나님의 법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라고 정리한다.

신약에서의 정의는 디카이오쉬네이다. 어원은 ‘디케’이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관습, 관습적인 것’이란 뜻인데 이 후에 사법적으로 사용되면서 ‘재판, 소송, 형벌, 민족’ 등의 의미로 쓰였다. 디케의 명사형인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약 92회 나타난다. 그 뜻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정직하고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공민적 미덕을 가리킨다.

 

성서적 정의의 신학적 의미

성경의 ‘정의’ 언어도 평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 ‘정의’ 언어와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개념을 신학적 차원에서 성찰하면 상당히 그 폭이 달라진다.

첫째 성서의 정의는 ‘하나님의 시각’ 에서 보는 정의이다.

 

이것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수동적 의지가 아닌 능동적 의지이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하나님은 그의 정의를 ‘반드시’ 이루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둘째 성서의 정의는 ‘관계’의 정의이다.

 

성경에는 두 가지 죄의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범한 죄(Commission)가 있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ommission)이 있다.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에서 부자는 거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는 범하지 않았다. 그가 범한 죄는 가난한 자에게 보여야 할 부자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 죄이다. 이처럼 성서적 정의의 관계적 개념은 약자에 대한 부자의 마땅한 배려인데 이 때 배려는 자선적이거나 시혜적 배려가 아닌 연대와 사랑의 배려여야 하며 바로 이런 배려가 정의에 해당되는 것이다.

 

셋째, 성서적 정의는 ‘구원’을 위한 정의이다.

이 하나님이 구원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의 반복적인 계약파기, 배신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까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다.

 

넷째, 성서의 정의는 ‘사회적 약자 편향적 정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정의가 핍박을 받는 자의 구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고, 자기 권리를 빼앗긴, 이른바 압제자의 모든 희생자들을 ‘의인’으로 간주했다. 시편 시인들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가난한 자들, 피억압자들, 감옥에 갇힌 자들, 과부들, 고아들, 나그네와 같은 ‘고난받는 자’ 혹은 ‘사회적 약자’들을 ‘의인’과 동의적 평행법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산상수훈에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기업의 소유주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들이 구원받을 길이 없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향한 편향적 선택이 바로 여기에 필요한 것이다.

 

칼빈도 노동자들이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소리라고 했다.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성경에는 인권이란 단어가 따로 없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호소할 때 하나님이 거기에 응답하시는 그 행위가 바로 성서적 인권의 개념이다. 히브리노예들이 애굽에서 극심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응답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 인권 개념이다.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고는 다른 곳에 호소할 수 없는 자를 향한 응답이 하나님의 인권이고 하나님의 정의이다.

 

다섯째 성서적 정의는 윤리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matter of faith)’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의 존재의 의미는 제사하는 백성이 아니라 체데크와 미슈파트, 즉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삶을 살 때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만민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며 그 복을 함께 누리게 된다. 이 어구가 특히 이사야서에서 ‘신실한’(hnman) 혹은 이 단어의 변화형과 함께 나타난다는 점은(사1:21,26-27, 11:4-5, 16:5, 28:16-17, 33:5-6) 이 어구가 단순한 사회정의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H.G.M.

 

사실 사회정의 혹은 사회윤리라는 말은 체데크와 미슈파트가 하나님백성의 삶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명령이라는 점을 흐리게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적 삶이 있고, 마치 체데크와 미슈파트는 그것에 별도로 부가되는 또 다른 윤리처럼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관한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전부는 예배나 제사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체데크와 미슈파트이다. 체데크와 미슈파트,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 백성의 사회윤리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백성을 부르신 목적이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암 5:24)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는 단순히 자선사업이나 윤리나 도덕의 일이 아닌 바로 신앙의 문제(matter of faith)가 되는 것이다.